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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시이棗栗枾梨에 담긴 마음

홍성범
숲해설가


설날과 추석의 차례상과 기제사에 올리는 음식들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이어온 예禮의 기억이자, 조상과 후손을 잇는 마음의 상징이다. 그중에서도 과일을 대표하는 ‘조율시이棗栗枾梨’, 즉 대추, 밤, 감, 배는 제사상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데 각기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대추와 밤, 감과 배는 각각의 색과 모양, 향과 맛이 다르지만, 그 속에는 공통된 조화와 질서가 깃들어 있다. 붉은색은 생명과 기운을, 흰색은 순수와 정결을 뜻하며, 둥근 열매는 충만과 풍요를 상징한다. 제사상에 이 네 가지 과일을 올리는 일은 단순한 전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삶의 조화를 되새기고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대추는 제사상에서 맨 처음 동쪽 자리를 차지한다. 대추는 다산과 생명의 상징으로, ‘조棗’의 음이 ‘조속히(早)’와 같다고 하여,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옛날 혼례상에도 대추와 밤을 올려 자손을 기원했듯, 대추는 언제나 새 생명의 시작을 뜻한다.
대추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이 자란다. 봄에 늦게 잎이 나고, 가을에 늦게까지 열매를 달고 있다. 그 강인한 생명력은 마치 고된 세월을 묵묵히 견디는 인간의 의지를 닮았다. 조선의 학자 이익은 “대추는 작으나 속이 알차고, 가지는 굽었으나 본성은 곧다”고 말했다. 대추의 작고 단단한 열매는 겉보다 속을 중히 여기는 우리 조상들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옛 민속에서는 대추나무가 귀신을 막는 나무라 여긴다. 단단한 나무결이 사악한 기운을 막아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 앞에 대추나무를 심어 가정의 평안을 빌었다. 대추 한 알에는 단단함 속의 진심, 그리고 생명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대추는 영양학적으로도 훌륭한 과일이다. 대추의 비타민C 함량은 사과와 복숭아의 100배나 된다. 한의학에서는 홍조가 약성을 조화시키고 약의 독성을 완화시키는 효능이 있다고 귀히 여긴다. 근래에는 과민성 알레르기에도 효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추는 사찰에서도 귀하게 대접했다. 대추 열매를 끓여 진하게 달인 후 환을 지어 먹으면 한두 알로도 식사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하여 수도하는 스님들에게 선식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밤은 충실함과 효의 상징이다. 밤나무는 여름 내내 잎을 무성하게 키우고, 가을이 되면 가시송이 속에 단단한 열매를 품는다. 그 모습은 부모가 자식을 품듯, 외형은 거칠어도 속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제사상에 밤을 올리는 이유는 바로 그 부모의 마음을 닮은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밤은 예로부터 귀한 식량이었다. 풍년에는 단맛을 즐겼고, 흉년에는 구황식품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이어주었다. 밤을 갈아 죽을 쑤고, 가루로 만들어 떡을 빚으며, 사람들은 밤을 ‘하늘이 내린 곡식’이라 불렀다. 『산림경제』에는 “밤 한 알로 한 고을을 살릴 수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밤이 가진 풍요와 생명의 힘을 보여준다.
밤나무는 우리 산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근면함과 인내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깊은 산중에서도 스스로 열매를 맺고, 때가 되면 조용히 알을 떨어뜨린다. 그 겸손한 결실은 삶의 진정한 충만이란 스스로의 뿌리를 지키는 일임을 일깨워 준다.
감은 가을의 정취를 가장 잘 담은 과일이다. 다른 나무들의 잎이 다 떨어져도 감나무는 붉은 열매를 남겨 놓는다. 그 붉음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 속에서 단맛을 만들어낸 인내의 증표다. 덜 익은 감의 떫은맛은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고, 대신 은근한 단맛으로 변한다. 감은 그렇게 기다림 속에서 완숙해지는 것이다.
감나무는 군자의 나무로 불렸다. 줄기는 곧고 단단하며, 해마다 열매를 탐욕스럽게 맺지 않는다. 오히려 가지를 덜어내고, 남은 열매를 더욱 탐스럽게 익힌다. 이는 욕심을 버릴수록 삶이 깊어진다는 진리를 상징한다. 감은 성숙과 절제의 미덕을 가르치는 과일이다.
또한 감은 불로장생의 상징이다. 감을 말려 만든 곶감은 오랫동안 저장해도 쉽게 상하지 않는데 세월이 지나도 단맛을 간직하는 감처럼 오래 지속되는 복을 바라는 마음이 곶감 한 조각에 담겨 있다.
가을 늦게까지 잎과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감나무는 아름답다. 고즈넉한 산사의 뒤뜰에 서 있는 감나무는 그 사찰의 역사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영국 왕립식물원 큐가든에도 가장 잘 보이는 광장 중앙에 감나무가 있는데 그만큼 조경으로도 대접받는 나무다.
감은 이름도 많다. 풋감, 땡감, 단감, 연시, 홍시, 침시, 곶감, 건시, 고종시 등.
우리의 시골 마을마다 감나무는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다른 과일나무에 비해 저장이 가능하여 식량으로도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배는 서쪽의 자리를 차지하며, 흰빛으로 맑음과 정결을 상징한다. 배는 네 과일 중 가장 크고 향기로우며, 제사상에서는 조상을 향한 진심과 정성을 뜻한다. 배의 속살은 투명할 만큼 맑고 한입 베어 물면 시원하고 단맛이 퍼진다. 그 순수함은 조상을 향한 깨끗한 마음을 나타내기 충분하다.
배나무는 다른 과수에 비해 손이 많이 간다. 가지치기와 수분이 까다롭지만, 한 번 결실을 맺으면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제공한다. 이는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결실을 얻는다는 삶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옛사람들은 ‘배(梨)’와 ‘이별(離)’의 발음이 같다고 하여 혼례에서는 배를 피했지만, 제사에서는 오히려 그리움의 상징으로 올렸다. 헤어짐 속에서도 마음은 이어진다는 뜻이다.
대추, 밤, 감, 배는 각각 다른 계절과 성질을 지녔지만, 제사상에서는 하나의 조화로 이어진다. 이 네 과일은 모두 인내를 통해 단맛을 만들어내는데, 여름의 더위와 가을의 서리를 견디며 맺은 열매이기에 그 안에는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덕목이 함께 깃들어 있다.
대추는 생명력, 밤은 성실함, 감은 인덕, 배는 정결을 상징한다. 이 네 가지 덕은 곧 인간이 살아가며 지켜야 할 도리이다. 제사상 위의 조율시이는 단순한 상차림의 순서가 아니라 삶을 조화롭게 가꾸라는 조상의 가르침인 것이다.
오늘날 제사는 형식으로 남았다고 하지만 그 위의 과일 하나하나에는 여전히 조상들의 숨결이 머문다. 대추 한 알의 단단함, 밤 한 톨의 충실함, 감 한 개의 인내, 배 한 쪽의 순수함은 모두 삶의 방향을 일깨워 주는 상징이다.
조율시이는 조화와 절제, 그리고 때에 맞는 삶의 지혜를 뜻한다. 조상을 향한 제사는 결국 자신을 돌아보는 의식이며, 제사상 위의 과일들은 조상에게 드리는 공경의 표시이자, 우리 삶의 균형을 되찾게 하는 거울이다.
오늘 우리는 다시 제사상 앞에 앉아 조용히 과일을 차례로 올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묻는다.  “나는 지금, 내 삶의 조율을 잘하고 있는가.”  그 물음 속에서 비로소 조상의 가르침이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