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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입동이라니

정성운
텃밭농부


농사에서 11월은 거두어들이는 시기이다. 밭은 지난봄부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맞아들였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줬다. 이런 시간이 있었기에 작물은 싹을 틔우고 몸집을 불렸다. 밭과 지수화풍이 키워낸 더덕과 고사리, 아스파라거스, 고추와 가지, 토마토, 감자, 옥수수, 상추와 부추, 쥐눈이콩은 내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었으며, 나를 살찌웠다. 올해는 처음으로 더덕 가루를 냈다. 공기가 차가워지면 마른기침이 잦은 아내를 위한 정성이다. 이들 모두에게 고마움의 예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즈음은 거둬들임과 함께 겨울 농사를 시작하는 때이다. 내 밭의 겨울은 마늘과 양파의 시절이다. 이들은 초겨울에 뿌리를 내리고는 그 상태로 봄을 기다린다. 마늘과 양파를 심지 않는 곳은 쉼의 시간이다. 하얀 눈이불을 덮어쓰고 고요를 즐길 것이며, 때론 삭풍이 불 때면 휘파람 소리를 내며 겨울을 즐길 것이다. 


농사는 우주가 참여하는 걸작품


농사의 팔구 할은 자연과 우주가 담당한다. 그 바탕이 되는 땅은 그 자체로 지구이다. 밭을 30cm 깊이로 파면 시초가 드러난다. 내 밭의 흙은 붉거나 노란색을 띠고 있다. 철분과 마그네슘 등의 광물질이 물에 녹으면서 나타낸 색이다. 페루의 비니쿤카라는 곳에 있다는 무지개산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거대한 봉우리 전체가 여러 색이 빚어낸 줄무늬를 보여준다.
흙은 암석이 바람과 물에 씻기고 압력과 팽창 작용에 의해 부서지면서 만들어졌다. 암석에 담겨있던 광물질은 동물의 사체와 식물의 잔해로 이루어진 유기물과 섞여 작물의 생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한다. 공기는 질소 공급원이다. 물은 이들을 뒤섞이게 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광물질과 유기물과 질소는 물에 녹아들며, 작물은 이 물을 흡수한다. 햇볕은 작물이 자라기에 적정한 온도를 만들어주며, 광합성의 요소가 된다. 온 우주가 참여해서 만들어내는 걸작품이다. 농사는 이 걸작의 탄생에 참여하는 경이로움이며, 농부는 오묘함을 담고 있는 작품의 빼어난 조연이다.


화계사 공양송에서는 이런 장엄함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밥은 / 대지의 숨결과 강물의 핏줄 / 태양의 자비와 바람의 손길로 빚은 / 모든 옛 부처님의 선물입니다.” 정물처럼 놓여있는 저 밥 한 그릇에는 우주의 역동이 담겨있다. 입에 넣어진 밥은 내 몸과 섞인다. 그리고는 크게 깨닫는다. “이 밥을 통해서 나는 / 모든 땅과 물은 나의 옛 몸이고 / 모든 불과 바람은 나의 본체임을 알겠습니다. 이 밥으로써 우주와 한 몸이 됩니다.” 밥 한술 먹음으로써 나는 우주가 되며, 우주가 된 나는 서원한다. “그리하여 공양입니다. / 온 몸 온 마음으로 / 온 생명을 섬기겠습니다.”


지수화풍으로 작용하는 우주는 생명의 밑바탕이다. 여기에 농부의 손길이 보태져 비로소 밥상이 된다. 농부의 할 일은 흙을 기름지게 하는 일, 씨 뿌리는 일, 병충해를 감소하는 일,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오관게는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하고 숙고하는 데서 시작한다. 우주의 움직임과 농부의 손길, 식재로 나르고, 다듬어 밥상에 올리는 이의 수고로움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 수고는 생명을 받드는 것이니,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다. 그러므로 공양이라 이름한다.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공양을 받았으니 나는 자비로써 회향해야 한다.
대개의 불자는 밥 한술 뜨기 전에 합장반배의 예를 갖추면서 나지막이 소리를 내거나 속으로 공양송을 읊조린다. 참으로 아름다운 몸짓이다. 불자다운 행이다. 공양송을 다 읊조리지 않아도 좋다. 첫 구절, “이 밥은” 또는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이것만 떠올려도 훌륭한 태도이다. 첫 구절에 공양송의 전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농사는 몸으로 짓는 일인데


밭에 나갈 때면 늘 생각하는 게 하나 있다. 농사는 팔구 할은 몸의 일인데, 나는 이게 몸에 배지 않았다. 이것저것 해야겠다는 생각은 많은데, 몸이 굼뜨다. 노동의 고통을 먼저 떠올린다. 늙은 농부의 그을린 얼굴과 굵은 손가락 마디는 몸으로써 논밭을 일구었다는 표시이다. 농사는 우주와 몸을 뒤섞는 일이다. 나의 얼굴은 약간 그을렸을 뿐이고, 손가락은 가늘다. 가끔 텃밭농부라고 나를 소개하는데, 참으로 민망한 노릇이다.
요즘은 밭 밖의 일이 많다. 지인들의 경조사가 연락이 잦다. 단체의 행사 참석 요청도 많다. 빠져서는 안 되는 일이 꽤 있다. 이런 이유로 미처 가을걷이하지 못한 작물이 있다. 쥐눈이콩은 꼬투리가 까맣게 된 지 오래다. 손대면 툭 하고 콩알이 튀어나갈 정도로 여물었다. 생강도 캐야 한다. 이 작물들은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둬야 한다. 서리를 맞으면 보관 중에 썩는다. 내 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서가 아니다. 밥상에 오르길 바라는 작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 아주 늦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밤 느닷없이 서리가 내릴 줄은 어찌 알겠는가. 설악산은 이미 눈 소식을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가을걷이는 늦추더라도 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심는 일이다. 지난주에 마늘을 심었다. 마늘은 늦게 심으면, 땅이 얼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뿌리를 내려야 땅을 움켜쥘 수가 있다. 양파도 그렇다. 땅이 얼면 심어놓았던 종자가 들뜬다. 작년에는 1년근 더덕을 옮겨 심었는데, 이내 땅이 얼어 절반 넘게 들떠서 죽고 말았다. 이런 낭패를 겪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늦었다고 해서 그냥 심으면 안 된다. 얕게라도 흙을 일구어 뿌리내림을 원활하게 해주어야 하며, 심기 일주일 전쯤에는 미리 거름을 뿌려 흙과 뒤섞이게 해주어야 한다. 몸이 고달플지라도 해주어야 할 일이다. 모름지기 농부라는 이름을 지녔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텃밭농사도 우주와 어우러진다


주제넘어 저어되지만, 남의 얘기를 늘어놓고 싶다. 벌레들이 뜯어먹어 농사를 망쳤는데, 어떤 약을 쳐야 할지를 묻는다. 가을비가 잦아 무름병이 왔다면서 약을 쳤더니 효과가 있더라는 얘기도 한다. 요소 비료를 한 줌 뿌려줬더니 쑥 컸다면서 비료의 특효에 놀랐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텃밭농사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벌레가 많아 잎을 갉아먹는 곳에는 뿌리채소를 심는 게 좋다. 뿌리를 갉아먹는 곳에는 잎채소를 심는 방법이 있다. 장소를 조금만 바꾸어도 효과가 있다. 도랑 옆에는 물을 좋아하는 토란이나 미나리, 배추, 무를, 밭 가운데는 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고추를 심으면 좋다. 잘 짓는 농사는 밭의 상태를 알아야 하며, 작물의 특성을 이해할 때 얻어지는 결과이다. 또 습해를 막으려면 배수로를 손보거나 이랑을 조금만 더 높게 만들면 어느 정도는 예방할 수 있다. 비료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것이 각종 액비다. 물통에 남은 음식물이나 베어낸 풀을 담가두어 삭히면 천연액비가 된다. 액비를 물에 200배쯤 희석해서 뿌려주면 된다. 이런 일들은 몸을 움직여야 한다. 효과가 좋다고 하여 농약을 치거나 화학비료를 뿌리면 몸의 고달픔이 확 줄어든다. 여기에 습관을 들이면 몸의 움직임이 적어진다. 우주와 뒤섞이는 농사의 근본과도 멀어지게 된다.
가을은 이미 깊어졌고, 지나가는 가을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어어 하다가 가을은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났고, 7일이 입동(立冬)이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 뒤늦은 후회처럼 밭 가장자리를 서성이며, 마무리도 시원찮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려보았다. 올해도 때때로 춥고 따뜻한 겨울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