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스님
본지 발행인
구룡사 회주
며칠 사이에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습니다.
제천 부처님마을, 운조암에서 수확한 올해 김장용 배추만 해도 1만여 포기에 이릅니다. 그 중에 조금은 고라니에게 보시하고 나머지는 모두 구룡사와 여래사에서 김장까지 마쳤습니다. 고추농사도 잘 지어서 1,500근 정도 수확을 했습니다. 고구마도 트럭으로 서너 차 분량을 캐왔고, 감자도 마대자루로 250포 가량 불자님들과 나눔을 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박, 가지, 야콘, 깻잎 등 금년 농사를 모두 잘 지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메주를 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스님들과 불자님들의 수고로움이기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주지소임을 마치고나면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난 10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을 봐도 그렇습니다. 이번에 대만 불광산사, 중대선사, 제원사 불사현장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내 캐나다 토론토의 대각사 법회와 뉴욕 원각사 법회에 다녀왔습니다. 또 일본 후쿠오카 정행사는 정토진종을 창종하신 실란성인의 750주기 큰법석에서 400년 전, 열반하신 사명대사四溟大師님을 기리는 법회가 있어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보람된 법석이었습니다.
어디에 있던 바쁜 일정으로 움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평 백련사에서 봉행된 관조선사님의 열반 6주기 헌다례와 해인사 승가대학총동문회 정기총회에도 다녀왔습니다. 내일은 순천 송광사에서 금강경 산림법회가 있어 내려가려 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보고 느끼는 몇 가지 단상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캐나다와 미국에 머무르며 느끼는 우리네 인생도, 곱게 물든 단풍잎처럼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곳에는 강력한 토네이도가 들이닥쳐서 뉴욕으로 이동 하는데 비행기 대신 자동차를 이용하였습니다. 덕분에 좋은 풍광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강력한 바람 탓에 단풍잎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나뭇잎은 자연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잃지 않았습니다.
단풍이라는 것은 우리네 인생으로 치면 노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모습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즐깁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우리네 인생도 나뭇잎처럼 곱게 물들어가며 살았으면 합니다.
또 일본 정행사 법회에 참석해서는 인연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일본 정토진종의 본산인 정행사에서 정토진종을 창종하신 실란성인을 기리는 행사에 사명대사를 조명하는 책을 봉헌하는 인연이 있었습니다. 또 길지 않은 기간에 통도사와 표충사를 중심으로 해서 대한민국 사찰에 모셔져있는 사명대사님의 영정, 수록한 방대한 사료들, 정행사 주지스님, 대중스님들의 정성이 녹녹히 배어있었습니다.
해인사에서는 작은 행동에도 주인의식이 있었습니다. 주지스님이 도량을 안내해 주었는데, 전각에 들어설 때 켜두었던 불들이 전각에서 나오고 나면 하나같이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동행한 스님들이 해인사 소임자 스님들도 아닌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마지막에 나오는 스님이 스위치를 찾아서 불을 소등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승가의 모습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해인사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그 느낌을 안고 돌아오는 길에 가야산 자락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내륙고속도로를 지나올 때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등성이가 히말라야에 버금갈 만큼 새하얀 세계로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풍광을 보면서 계절의 움직임을 새삼 느끼게 하였습니다.
오늘은 보현행원품 중에서 9번째 서원인‘항상 중생을 수순隨順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선남자여, 또한 항상 중생을 수순隨順한다는 것은 진법계 허공계 시방세계에 있는 중생들이 가지가지 차별이 있으니, 이른바 알로 낳는 것, 태로 낳는 것, 습기로 낳는 것, 화해서 낳는 것들이 혹은 지수화풍을 의지하여 살기도 하며 혹은 허공이나 초목에 의지하여 살기도 하는 저 가지가지 생류의 몸과 형상과 모양과 수명과 종족과 이름과 심성과 지견과 욕망과 행동과 거동과 의복과 음식으로 마을이나 성읍이나 궁전에 처하며, 내지 모든 천룡팔부天龍八部와 인비인人非人 등과 발 없는 것, 두 발 가진 것, 네 발가진 것과 여러 발 가진 것들이며 빛깔 있는 것, 빛깔 없는 것, 생각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생각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 없는 것도 아닌 이러한 여러 가지 중생들을 내가 다 수순하여 가지가지로 섬기며 공양하기를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스승이나 아라한이나 내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이 받들되,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길을 가르치고, 어두운 밤중에는 광명이 되고, 가난한 이에게는 보배를 얻게 하나니, 보살이 이와 같이 평등의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이니라.
어떠한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능히 중생을 수순하면 곧 모든 부처님을 수순하고 공양함이 되며 만약 중생을 존중히 받들어 섬기면 곧 여래를 존중히 받들어 섬김이 되며, 만약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심이 나게 하면 곧 일체 여래로 하여금 환희하시게 함이니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대비심으로 체體를 삼으시는 까닭에 중생으로 인하여 대비심을 일으키고, 대비로 인하여 보리심을 발하고, 보리심으로 인하여 등정각을 이루시나니, 비유하건대 넓은 벌판 모래밭 가운데 한 큰 나무가 있어 만약 그 뿌리가 물을 만나면 잎이나 꽃이나 과실이 모두 무성하는 것과 같아서 생사광야의 보리수왕도 또한 그러하니 일체 중생으로 뿌리를 삼고, 여러 불보살로 꽃과 과실을 삼고, 대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하게 하면 즉시에 여러 불보살의 지혜의 꽃과 과실이 성숙되느니라.
어떠한 까닭인가. 만약 보살들이 대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하게 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보리는 중생에 속하는 것이니 만약 중생이 없으면 일체 보살이 마침내 무상정각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너희들은 이 뜻을 마땅히 이렇게 알지니, 중생에게 마음이 평등하면 능히 원만한 대비를 성취하며, 대비심으로 중생을 수순하면 곧 부처님께 공양함을 성취하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중생을 수순하나니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수순은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 상속하고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
일요일 날, 불교텔레비전에 법회 하러 갔었습니다. 방송국에 회장으로 계시는 파계사 성우스님과 차 한 잔 나누다가 스님께서 묻기를, “요즘 정우스님은 뭐하고 지내시요?”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농사 지으며 삽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그렇지요. 보리농사 지으면 좋지요.”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법문하면서 했더니 앞에 앉아있던 한 불자가 “쌀보리” 합니다! 그 보리농사가 쌀, 보리 할 때 보리농사이겠습니까?
아뇩다라샴먁삼보리의 보리菩提농사 이겠지요. 그렇게 바쁜 날들의 연속은 시계추처럼 정해진 대로 머무르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인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이야 소년시절 뛰놀던 운동장도 한번 가보고 싶고, 가야산 자락 정상에도 한번 올라가 보고 싶고…. 금년에는 눈 오는 날 꼭 한번 구룡산 정상에 가보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현행원품의 9번째 서원을 포괄적으로 생각해보면 바로 믿고, 바로 이해하고, 바른 실천의 도리를 증득해서 한 몸으로 이루어가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을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절차를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지위 점차로 나타납니다.
어두운 밤길에는 빛의 광명이 되고 가난한 이에게는 보배로움을 얻게 하는 보살이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서원이 보현행원의 9번째 중생을 수순한다는 서원 입니다.
그러면서 적절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넓은 벌판의 모래밭 가운데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있어, 만약 그 뿌리가 물을 만나면 잎이나 꽃이나 과실이 무성하게 성장하는 것과 같아서 생사광야의 보리수왕(부처님)도 또한 그러하니 일체 중생으로 뿌리로 삼고 여러 불보살로 꽃과 과실을 삼고 대자대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하게 하면 즉시에 여러 불보살의 지혜의 꽃과 과실이 성숙되어서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중생에게 마음이 평등하면 능히 대자대비를 성취합니다.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희大喜 대사大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중생을 수순하게 되면,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 생각이 상속하고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태중에서 10달 동안 어머님의 보살핌을 받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알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50대 50 같지만 알 수가 없습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자리, 인간의 지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경계를 벗어난 자리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병아리가 먼저인지 따질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처음 올 때는 화생化生으로 왔다고 하셨습니다. 변화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연예인들의 전생을 보는 최면 프로에서 한 개그우먼이 자기는 전생에 독수리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독수리는 태로 낳았나요, 알로 낳았나요? 그 분은 전생에 알로 낳은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생에 알에서 날겁니까, 태로 날겁니까? 아니면 구품연화대에 화생할 것인가요. 그렇기 때문에 고집하고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잘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이 최초에는 화생으로 태어났다고 하셨을까요. 그리고 화생으로 태어난 그 시절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최초에는 화생으로 태어났는데, 그것이 업이 되고, 업이 되고, 또 업이 되면서 태란습화 사생四生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겪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번뇌가 생기고, 업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이 병이 났을 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없다면 불보살님 또한 없을 것입니다. 무시무종한 시간에는 중생들도 화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번뇌가 없어서 부처님과 여래가 그 세상에는 계시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화생化生, 화생에서는 굳이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도 될 만큼 번뇌에 찌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비춰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씨앗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과덕의 열매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열매를 가지고 있어야 줄 수 있습니다. 열매는 씨앗을 심기위한 종자로 줄 수 있지만, 씨앗은 다 주고나면 무엇으로 종자를 삼아 농사를 지을 것입니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이웃들에게 씨앗을, 불종자의 씨앗을 나누어주는 그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보리심이요, 보살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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