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인도 북부,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9)와 티베트 난민들에 의해 수립된 티베트망명정부가 자리한 다람살라에서 한국인 불자들의 요청으로 11월 11~13일 달라이라마의 법회가 열렸다. 올해로 14회를 맞은 달라이라마의 법회는 경주 동국대학교 티베트 대장경 역경원 원장 진옥(여수 석천사 주지)스님의 주관으로 한국인 200여 명이 동참했다. 법문은 용수보살의 <중관보만론>으로서, 불법을 따라 신심을 일으킨 이가 열 가지의 선법으로서 무명의 실상을 바로 알고 일체 종지를 구하는 수행법의 차제와 자비심을 일깨우는 자타 상호 교환법의 도리를 주제로 했다. 광대한 대승의 논전 가운데 중관 입장의 논서로 인정받는 <중관보만론>은 달라이라마가 스승 세콩첸섭린포체로부터 사사했으며 올해는 전체 10장 가운데 1장을 마무리 했다.
달라이라마는 한국 사회의 자살 문제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면서 물질적 성장과 반비례 하게 황폐해져 가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의 심각성을 법문의 시작으로 다뤘다. 그러한 때에 21세기에 부합하는 현명한 종교인들의 바른 믿음 형태와 역할을 당부했다. 법회의 마지막 날 질의응답 시간에는 한국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티베트불교 겔룩빠의 이단 ‘슉덴’ 문제가 공론화되기도 했다. ‘슉덴’은 현재 까담불교라는 이름으로 호남 지역 전주와 광주 등지에서 활동 중이며 그 회원이 수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슉덴’은 5대 달라이라마 당시 추앙 받는 선지식으로서 평생을 존경 받았으나 임종 후 호법신장으로 변질되어 티베트불교의 암적 존재로 전락, 오늘날 그 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되고 있다. 달라이라마의 해외 법문이 열리면 ‘슉덴’ 추종 단체들은 가두시위를 벌이며 ‘달라이라마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슉덴’의 배후 세력으로 중국정부가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달라이라마는 관련 답변을 자제하고 있으나, 스스로도 한 때 호법신장으로써 ‘슉덴’을 섬겼던 탓에 1959년 인도 망명 이후 ‘슉덴’의 문제는 달라이라마 여생의 해결 과제로 남아 있음을 밝혔다.
반야경을 따르는 법통은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몽고 등이며 용수보살을 수승한 선지식으로 삼습니다. 용수보살의 저서 여섯 가지 논서를 집약한 대표 논서 가운데 최고로 뽑히는 것이 바로 <중론>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아라한은 반드시 무아를 깨달아야 성취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공성의 차제를 다룬 반야부의 핵심 경전이 <중론>이며 심의한 수행 차제로서 미륵보살의 논서 <현관장엄론>이 있습니다.
<중관보만론>은 지도자에게 주는 가르침으로서 해탈에 이르는 길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미에는 자비심을 키우는 자타 상호 교환법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이른바 광대원만한 대승의 논서입니다. 법은 두 가지의 측면으로 해석됩니다. 인과를 인정하고 고통의 결과로부터 구제된다는 의미와 종교라는 신앙의 측면에서 광의적인 정의가 그것입니다. 이른바 종교의 역사는 3천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시간의 활동 기록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제어되지 못한 마음을 그 원인으로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오늘의 21세기는 과학문명의 정점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한국은 물질문명의 최고점을 상징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반면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 수양에 있어서의 발전은 어느 만큼의 성장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가 가운데 1위의 자살률이라는 한국의 불명예는 물질적 풍요와 반대로 마음의 불안 정도가 얼마나 큰가를 반증합니다. 불안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요. 가족과 조직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해 무너진 신뢰로 야기된 중압감은 개인의 불안을 초래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티베트 난민 공동체에서 자살과 관련한 소식을 최근에 한 건 들은 바 있습니다. 근래 북인도의 라다크에서 벌어진 자살 관련 소식이 들려와 그 원인을 살펴보니 그 역시 급진적인 물질적 풍요와 관련한 사건이었습니다.
일련의 사례를 말미암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종교의 역할과 책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에 부합하는 종교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이웃 종교의 예를 들어 봅시다. 창조주에 의지하는 신앙 활동은 모든 고난의 근원을 신의 뜻에 둡니다. 그 근간은 사랑이라고 철저히 믿습니다. 이슬람의 신앙에서 역시도 알라의 뜻에 창조된 인류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불교도 역시 사무량심으로서 행복을 성취하고 더불어 이루는 바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더불어 70억 인류 가운데 비종교인은 10억여 명에 이릅니다. 그들을 모두 합한 인류 공동의 화두는 모두가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들더라도 남북의 분단 상황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현실에서 그 근간을 보면 모두가 하나의 핏줄을 지닌 한민족임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타인을 합한 우리는 공동의 업을 공유하고 있음을 염두 해야겠습니다. 더욱이 각기 다른 신앙의 이견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종교 살상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우선 과제 중에 하나입니다.
물질적 가치를 우선하며 추구하도록 교육하고 있는 현대교육의 체제는 우리가 잊고 있는 실제 근간으로 삼아야 할 인문학적 관점을 재조명합니다.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윤리의 개념적 공교육 체계의 중요성이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본논리에 의해 성공이 가능한가에 관한 교육에 있어 우리가 먼저 근저에 두고 사유의 바탕에 둬야 할 것은 모두가 동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을 먼저 사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불교도는 붓다를 성취할 수 있는 씨앗 즉,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자비로 탄생한 우리의 근본에는 사랑의 종자를 내재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마음의 평안이 육체적인 건강으로 직결되고 있음을 면역체계 연구로서 현대과학에 의해 증명된 바 역시 매우 흥미롭습니다. 인간과 관련한 전반적인 문제의 해답은 여기서 구할 수 있습니다. 물질문명의 구조 안에서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바는 사랑과 자비의 개념입니다. 고가의 다이아몬드 반지에 애착을 품으려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의 행복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실상을 바로 봐야겠습니다.
종교에서 권고하는 사랑과 자비는 21세를 평화와 대화의 시대로 추구하고자 하는 서원이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불교는 중생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이념을 기반으로 삼습니다. 종교를 신앙하는 이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창조주를 인정 하는가 인정 하지 않는가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사유하고 행하는 신앙의 근저에서는 공통적으로 만족과 용서를 설합니다. 타인을 헤하지 않고 존중하며 화합해야 하는 이유를 강조함이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불교는 무아를 근거로 삼습니다. 오온으로부터 독립된 실체가 없음으로서 무아입니다. 불교의 법맥은 빠알리와 산스크리트로 나뉘며 그 구분의 핵심은 경율론 삼장에 의거합니다. 수에서 많고 적음의 차이를 보이는 별해탈계와 계율의 전통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율장을 통해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발심의 동기의 측면에서나 일신의 해탈을 구하는 목적의 부분에 있어서도 일체 중생을 위한 해탈의 두드러진 차이의 관점에서 논장 역시 차별을 보입니다.
반야심경의 ‘오온개공도’는 법무아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번역에서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만, 티베트 본에서는 ‘오온조차도’와 ‘오온까지도’라고 해석하여 인무아와 법무아를 모두 아우릅니다. 인아의 실체가 없음에 무아임을 강조하고 12처와 18계가 무자성임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개념화 되어 이름이 붙은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하다’는 바의 의미는 존재 방식의 측면에 있어서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서 존재하는가에 대한 그 방식으로서의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여 성립된 인과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로서 삼세의 모든 붓다는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공성을 깨닫는다고 일컫는 것임을 헤아려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공성 수행을 통한 이익은 무엇일까요. 일체 종지를 구하는 보리심이 일어난 마음의 자량도의 아제, 공성의 집중 수행을 통한 가행도의 두 번째 아제, 경도 지속적인 습을 들어가는 바라아제, 수도의 경계인 바라승아제, 일체 종지의 성불을 이루는 무학도의 경지인 모지스바하가 의미하는 바는 번뇌를 내는 마음에 실체하는 성질이 없음을 일깨우고자 함입니다. 보살의 7지에서 번뇌장을 모두 끊어 이후의 3지를 통해 번뇌의 습기인 미세한 소지장을 끊어냄으로써 무학도의 최종 과위를 성취합니다. 이 모든 수행의 차제를 논하여 명확히 밝힌 대승불교의 스승이 바로 용수보살입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가연숙
omflower@gmail.com / www.gagy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