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어 정착하는 과정에서 ‘남종선’이라는 중국 지역만의 고유한 불교가 만들어진다. 중국의 ‘남종선’과 똑같은 형태의 불교가 인도 땅에도 존재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종선’이 인도 불교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 ‘남종선’은 인도 불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당시 중국에 유행하던 교학 중심의 불교와 연결 지어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후대의 선종 역사에 따르면 중국 양나라 시대에 인도의 보리 달마 스님이 선불교를 이 지역에 전했다고 한다. 그러면 달마 스님은 무엇을 이 땅에 전하려고 했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니,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니,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니, ‘견성성불見性成佛’ 등을 떠올릴 것이다. 언어나 문자를 넘어서서 자신의 본성을 깨쳐 깨달음을 완성하자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말이나 글에 매이지 말고, 그 말이나 글이 궁극적으로 지시 또는 지향하는 것을 알아차리자는 발상은 비단 ‘남종선’에만 유독 부르짖는 것은 아니다. 언어나 글로 표현된 ‘교리’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의 하나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의미’의 전달과 체험에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교학 중심의 불교는 이 점에 소홀하였다. 문자적인 해석이나 철학적인 논의에 치중하였다. ‘남종선’에서 ‘불립문자’ 등을 제창하는 이유는 당시의 이런 교학 이론 불교에 대한 반성이고, 그에 대한 새로운 대안의 제시였다.
선불교가 이렇게 새로운 제시를 하지만,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 이론이다. 개인의 본성 속에는 부처와 똑같은 본성이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불성佛性 사상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선불교는 ‘불성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점에서는 기존의 교학 불교와 맥을 같이한다.
2.
불성사상에 입각하여, 상대가 저마다의 불성 체험을 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선승들은 ‘대화’라는 불교의 전통적인 방식을 채용한다. 불경을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불교 경전에는 ‘대화’가 많이 나온다. 중국의 선종의 조사스님들은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불성’을 일깨우고 있다. ‘불성’은 아트만처럼 ‘고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마음의 작용으로 항상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작용하는 ‘불성’의 존재양상을 대승불교의 전통에서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실체가 없으면서도 오묘한 작용을 하는 그런 존재임을 표현하느라고 ‘불성은 진정한 공이면서 오묘한 존재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런 ‘불성’의 작용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 명상 수련하는 것이 선종이다. 유명한 『원각경』 「보현장」의 다음 구절을 보면, 이런 맥락을 공감할 수 있다.
“선남자여. (무명이) 허망한 것임을 알아차리면 곧 허망함은 사라진다. (허망을) 없애기 위한
조작이 필요 없다. 허망함만 사라지면 그게 바로 부처이니 점차적인 과정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무명’이란 무엇인가? 『원각경』 「보현장」에 따르면,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4대를 ‘제 몸’으로 오인하고, 또 6근과 6경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마음을 ‘제 마음’이라고 오인하는 것이 ‘무명’이다. 즉 색·수·상·행·식 등의 5온이 공空한 줄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권하고 있다. 이것이 돈오이다.
우리말의 ‘알아차리다’는 용어는 한자어의 ‘지知’ 또는 ‘각찰覺察’을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5온의 무상을 알아차리는 명상 공부를 제시하는 점에서 보면, 교종이나 선종이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문제는 무심한 돈오수행이 되는가? 아닌가? 그것이 문제이다.
3.
우리들 중생들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에 무명이 있음은 실존적으로 체험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명이 싸여있는 사람이 어떻게 제 스스로 무명이 공한 줄을, 다시 말하면 5온이 공한 줄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무명을 대치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움직이면, 이렇게 움직이는 몸과 마음도 이미 무명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과연 몸과 마음이 공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비유하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어떻게 언덕의 고정된 사물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또 눈병 난 눈으로 어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止 사마타)’의 수련을 통해서 각종 ‘고요함’을 체험하고, ‘관(觀 삼마발제, 위파사나)’의 수련을 통해서 ‘자성 없음’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진정한 ‘고요함’일 수도 없고, 또한 진정한 ‘자성 없음’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무명에 휩싸인 ‘자아’가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명이 제아무리 실체가 없는 공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대치對治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안락’한 상태가 될 수 없다. 여기에는 적절한 ‘방법’의 시설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수련하는 마음을 내면 그 순간 실존적인 무명이 움직이고, 그만 두자니 무명의 상태에 놓여있다. 어찌해야 할까? 이 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교학과 선종이 방법을 달리한다. 교종 중에서도 특히 화엄종에서는 자신 속에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불성’을 이해하고, 그런 다음에 ‘지’와 ‘관’의 수련을 통해서 5온의 무상성을 ‘알아차리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무상한 무명으로부터 점점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세칭 ‘먼저 돈오하고, 다음으로 점수해야 한다.’고 한다. ‘돈오점수’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화엄교학에서는 ‘불성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보살의 만행을 실천하라.’고 한다.
반면에 선종에서는 ‘먼저 불성을 돈오하고, 그런 다음에 일체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심하라.’고 한다. 돈오돈수가 그것이다. ‘무심’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선종에서는 ‘화두’에 집중하여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을 쉬라고 한다. ‘화두를 드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무심하기 위한 수단이며 방법이다. 무심이 되기만 하면, 화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수단’이다. 이것이 돈수의 수행법이다.
그러면 ‘화두에 집중하는 마음’ 역시 이 또한 ‘번뇌의 상태에서 작동되는 마음’이 아닌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분석하지 말라고 한다. 그저 화두에 집중하는 마음 하나만 오롯하게 남겨두라고 한다. 이때에 사용되는 많은 화두 중의 하나가 ‘무無 자 화두’이다.
여기에 또 궁금함이 생긴다. 즉, ‘무無 자 화두’에 집중하는 마음은 ‘번뇌의 상태에서 작동되는 마음’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그것도 번뇌의 마음이다. 비록 그 마음이 다양한 경계에 대한 마음은 아닐지라도 ‘무’라는 ‘하나의 상태’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또한 ‘번뇌의 상태에서 작동되는 마음’이다. 이런 모순성을 당나라시대 앙산 혜적 선사는 ‘사무사지묘思無思之妙’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무사無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사有思’라고도 할 수 없는 오묘한 수행이 화두 수행이다. 선승들은 이런 수도를 통해서 ‘무명’의 허망함에 걸리지 말고 ‘불성’ 대로 인생살이 할 것을 제안한다.
선종의 선사들에게 있어서 ‘불성’은 누구에게나 원초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획득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경계에 ‘무심無心’하기만 하면, ‘불성’은 저절로 현전하는 것이다. 무심하면 돈오가 되니, 결국은 돈오돈수가 선 수행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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