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향로에 타고 남은 재를 보면 법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자들이 가지런히 정리해 놓아도 향이 탄 재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이,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 전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을 보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은 결코 무엇을 요구하는 일도 없습니다. 무엇을 한다는 조건도 없습니다. 우리와 더 불어 함께 살아가고 계실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할 바른 길을 보여주실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셨던 역대 선지식처럼, 우리들도 조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생은 초대하지 않아도 저 세상으로부터 왔습니다. 저 세상으로부터 왔다가 허락받지 않아도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렇게 초대하지 않아도 왔다가 허락받지 않고도 떠나가야 하는 인생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지구 둘레와 자전의 속도로 계산해 보면서 인생살이의 길이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지구의 거리는 약 4만km라고 합니다. 그 지구가 24시간, 1,440분에 스스로 한 바퀴씩 돕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면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데,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어김없이 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돌고 있는 4만km의 거리를 시간으로 나눠보면, 한 시간에 1,666km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1분에는 27.75km를 돕니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시속 110km이니 주행속도보다 15배나 빠릅니다. 지구가 돌고 있는 거리를 우리 인생의 나이로 보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왔다가 가는 길목에서 어떤 이는 하루하루의 인생이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로 느껴지는 삶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지나고 보면 10년 20년이 하룻밤 꿈처럼, 언제 그렇게 가버렸는지, 지나왔고 또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왔고 노력하며 살다 떠나가야 할 때 후회 없는 인생, 여한 없는 인생이 될 것이니 초심初心을 지켜가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한 인생은 어떤 삶일까요? 얽매임이 없는 인생입니다. 치우침이 없는 생활입니다. 자유로운 여백의 삶이라 여겨집니다.
통도사와 구룡사를 오갈 때 수서역을 주로 이용하게 됩니다. 고속전철을 이용할 때마다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발전해 가고 있는데, 우리도 진화가 필요한 시대에 노출되어 있는데, 세상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데, 어떻게 적응하며 진화해 갈 것인가? 하는 숙제만 우리들에게 문제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바르게 진화하고 적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국의 대처수상이 아버지로부터 듣고 인생의 모토로 삼았다는 정치철학은 결국 내가 변하는 것, 내가 바뀌는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소로본 대학 교수이자 철학자 프랑수아 슈너는 말합니다.
“발전에는 공동체의 사회적 발전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영적인 발전도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영적인 리스(nieeds)가 반드시 필요하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발전해 가는 현대사회에 스스로 적응하고 변해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적응보다는 불행하게도 이상理想도 없고 인생 프로그램도 없다는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고 있는 그런 사회가 불행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여한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한 없는 삶, 후회 없는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는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의 삶이라 하였습니다.
불교를 학문적으로 표현하면 스스럼없이 인간학人間學이라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폭력을 반대하고 무질서와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윤활유요 비타민 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불교의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살의 행원行願을 위해서 기도하고 명상하고 염불하는 것입니다.
흔히 ‘만 가지 악의 근원이 욕심’이라고 하였는데, 불교의 수행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욕구, 욕망, 욕심을 없애고 그 자리에 따뜻함과 넉넉함, 포근한 배려의 친절한 어울림이 보살행이 되어서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수행이었습니다. 그러한 수행을 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自業自得 그 자체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만드는 존재인 것입니다. 매순간마다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미래의 삶을 이뤄가는 존재입니다. 창조해가는 것입니다. 그 존재가 바른 생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철학에서는 ‘오로지 생각이다. 사람이 뿌린 생각이라는 씨앗은 행위의 열매가 되고 행위를 다시 심으면 습관을 거두어 수확하게 된다. 습관은 성격이 되고 성격은 운명이 된다.’ 말합니다.
영국의 대처수상이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듣고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우리의 인생은 생각이 좌우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들이라면 화엄세계華嚴世界에서 말하는 우주의 질서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이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세계가 있는데, 이를 일러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세계인 육도六道입니다. 육도 중에서 제일 안 좋은 지옥이나 제일 좋다는 천상의 세상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야 하는 선행善行, 연민심憐愍心을 지녀야 하는 자비慈悲, 너그러움의 포용包容입니다.
행복은 영혼의 본질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심下心하고 인욕忍辱하는 것이 수행이듯이 선근善根과 지혜智慧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 법문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송이의 꽃을 깊이 들여다볼 때 우리는 그것이 꽃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연현상으로 나타나는, 시간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계속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 꽃이 거름이 되어가고 있는 것도 알게 된다.”
만일 그 이치를 모르면 어느 날 그 꽃이 시든다든지 썩는다든지 떨어졌을 때의 상실감과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다가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젊음과 건강과 목숨이 소중하지만 언제까지 젊음과 건강과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로병사生老病死도 한 송이의 꽃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내면의 이치도 똑같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반대로 꽃 대신 거름을 깊이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그 거름이 결국 꽃이 되고 열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꽃과 거름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꽃과 거름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유기비료를 쓰는 정원사는 거름을 결코 하찮게 다루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도 그 지혜로운 정원사와 같이 우리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현상들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인생이 항상 젊음만 유지하고, 젊음만 필요로 하고, 젊음만 최상의 모습이기를 바라다가는 결국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생로병사에 소년기와 청년기와 장년기와 노년기가 모두 소중한 과정이라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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