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사 ‘가비지안’에서
이서연
시인
계절은 이전의 계절을 이끌어 간다. 계절의 몸짓이 또 다른 계절을 부르고, 마지막 없는 순환에서 시나브로 나이테를 두르며 흘러간다. 나와 마주한 계절 속에서 시간의 결을 만져 본다. 온 곳 없이 가는 시간 앞에 난 어디에 있는 것이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고단한 삶도 눈 한 번 감고 뜨니 꿈이고, 즐겁던 삶도 꿈속의 꿈이었는데 미처 꿈에서 깨지도 않은 채 살아간다고 무척 애를 쓰고 살았구나 싶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전쟁을 인류가 치르는 동안에도 시간은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흘러갔다. 세계사를 보면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운명이 균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던 시대가 이번만은 아니었지만 누구도 연습없는 인생이라서 그저 속절없이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에겐 찰나도 길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겐 찰나마저 긴 호흡으로 살뜰히 챙겼을 것이다. 마음에 서랍을 두고 차곡차곡 그 찰나들을 쌓아둔 이도 있을 것이고, 그 서랍에서 하나하나 찰나를 꺼내 적절하게 효율적으로 활용한 이도 있을 것이다. 겨울을 준비하는 시간에 ‘부처골’ 불곡산을 찾아간 것은 그 어떤 찰나에도 흔들릴 수 없었던 ‘나’하나 챙겨보기 위함이었다. 마음에 서랍을 두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체로 살았기에 지금쯤 그 ‘나’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겨울을 재촉하는 날씨 속에 옷을 벗어버린 나무들 아래로 쌓인 낙엽으로 산길은 푹신해졌고, 늦가을 안개에 젖어버린 대광사 도량은 신성스런 분위기가 가득했다. 예로부터 영험많고 성스러운 곳이라 하여 성덕산이라 불리었다는 불곡산에 대사찰이 들어선 것은 1992년 당시 천태종 2대 종정이셨던 대충대종사께서 “고통 받는 만중생의 귀의처가 될 천하명지”라 증명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높지 않지만 넉넉한 품을 가진 산에 중생들의 귀의처를 마련한 안목에 저절로 마음으로부터 합장을 하게 된다.
웅장한 법당은 2017년 인간문화재 신응수 대목장의 의해 14년간의 대작불사 끝에 건립된 동양최대 목조건물이다. 목재는 홍송 600~900년 수령으로 외형상 3층 중층 다포집 구조지만 1층 통건물로 33미터 높이의 미륵보전 안에는 17미터에 이르는 미륵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 미륵부처님을 조성하는데만 3년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인 법화경에 의거 관음정진 수행을 하는 도량답게 관세음보살 염불소리가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도량 한 켠에 마련된 학이 곧 날아갈 채비를 마친 듯 보인다.
나를 알아차리는 한소식이
또 하나의 계절을 지나간다
바람에 묶어 놓은들 시간이 묶이겠는가
한소식 늦는다는 건
멈추어야 할 순간을 잃어버린 욕심 때문
미륵대불 눈짓에 흠칫
질긴 어리석음을 가을잎처럼 벗을 수 있다면
겨울에 뼈다귀로 서 있더라도 푸르리
-<미륵대불 눈짓에> 전문-
날갯짓은 학이 하고 있는데 정작 날고 있는 것은 미륵보전 처마 끝 용들이다. 바람을 타고 있는 풍경에 용이 날고 있다. 누구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특이한 풍경이다. 풍경 끝에 물고기를 매달아 놓는 것은 끊임없이 용맹정진하라는 가르침이 숨어 있다. 그러나 용이 풍경 끝에 매달려 있는 건 중생들 고통을 풀어주려는 뜻의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스쳐가는 인연 속 업들이 껍질을 벗는 모습일까, 헛발질 하다 이제사 시간의 행간을 타고 넘어가는 영혼들의 몸짓일까. 뒤꿈치 들고 흔들리는 발끝으로 서서 먼 처마 끝을 바라보니 심신이 지친 이들의 귀의처로 대광사가 꼽히고 있는 이유가 느껴졌다. 허공을 쥐었다 풀어내는 호흡과 호흡 사이에 쉼표를 찍어볼 수 있는 도량이다.
역사가 깊은 사찰은 아니지만 제대로 먼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기품 있는 도량이 되려는 움직임에 활기가 느껴졌다. 범종각이 거의 완성이 되어 마무리 작업하는 것이 보였다. 새해엔 저 울림이 큰 자비지혜의 기운을 법계에 울려 주리라 보인다.
구인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 천태종을 중창하신 분이 상월원각대조사다. 부처님의 교리와 현실에서 그것을 실현해 내는 일을 하나의 수행실천으로 여기고 즉,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어울리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자세가 그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다. 실천과 지혜가 하나로 이뤄지도록 수행을 강조한 상월원각대조사의 사상이 천태종 사찰에서 계속 꽃을 피우고 있다. ‘큰 빛’이라는 뜻의 대광사 역시 중생의 마음높이에서 중생의 고통을 이해하고 헤아려 포교하는 흔적이 보인다. 음성공양을 올리는 합창단, 차를 우리고, 향기를 음미하며 함께 차를 마시면서 도반의 정을 쌓아가는 다도회, 봉사하는 생활로 부처님의 향기를 전하는 연화회, 지장회, 꽃공양을 올리는 락원회를 비롯해 학생회, 어린이회, 청년회 등의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사찰이 소통의 통로가 되고, 마음 마음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도록 문을 열어 놓고 있는 모습이다. 말과 뜻이 행함과 다르게 움직인다면 수행이라 할 수 없다. 실천으로 부처님 법을 전하는 불자들의 모습에서 내 부끄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잠시, 법당에 엎드려 부끄러움을 참회하고 “자비심으로 중생에게 힘을 더하고 갖추어 편안함에 이르도록 함”이라는 한 줄 글귀를 따라 카페 ‘가비지안’으로 들어갔다. 도시형 모던한 분위기의 북카페다. 제법 많은 책들이 꽂혀 있어 도서관을 옮겨 온 듯하다. 벽면이 전체적으로 유리로 되어 있어 햇살을 잘 받아들이고, 바깥풍경이 잘 보인다. 별로 꾸미지 않고도 ‘풍경’이라는 그림이 전체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계절마다 저절로 바뀌는 풍경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스스로 걸러지는 것 없이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 이 산사카페의 특징이다. 어느 각도에서 바깥을 보느냐에 따라 풍경이 다르고, 그 풍경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인간사 역시 다를 바 없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라는 자체도 마찬가지다. ‘마음’ 자체를 어디서 보느냐,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마음’은 구름처럼 달라진다. 그러나 걱정할 것이 뭐 있는가. 무겁거든 내려놓기 위해, 가볍거든 평안하기 위해 살아가면 되고, 가끔 가비지안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내 자체가 풍경이 되면 되는 것을.
제법, 한 해 기억이 풍요롭습니다
고작 한 뼘의 마음으로 살았건만
가비지안에서 쌍화차 한 잔 마시는 동안
눈맞춤으로 떠 온 구름을 헤아리니
부처 한 분이 오십니다
나를 주인공으로 모셔주시는 부처
가슴으로 지녀 봅니다
-<하루가 자비의 결이 되게 기도하며> 중에서-
자비심으로 깨달음으로 이르게 하는 편안한 길의 결이 차 한 잔에 녹아 있었다. 산사의 카페를 찾아가는 이유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된다. 다만 차 한 잔을 마시며, 그에 녹아 있는 부처의 결을 느낄 수 있다면 족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