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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平常心으로 사는 법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보살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은 구경에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들의 불종자佛種子를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상주설법常住說法하신다” 하셨습니다. 그것을 일상생활에서는 권선징악勸善懲惡입니다. 모든 악惡은 짓지 말고 모든 선善과 바른 행원行願은 실천한다는 뜻을 스스로 헤아려 살필 줄 알면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허망하고 허탈한 기억들이 많을 것입니다. 열심히 살지는 못했어도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보리심菩提心이 부족하고 변별력이 부족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늘 부침浮沈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마경維摩經』에는 “나고 죽음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열반涅槃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생사生死의 바다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살菩薩의 행원行願이다. 모든 중생을 사랑하면서도 세속적 애욕과 애정에 물들지 않는 것이 보살의 바라밀이다.”
『아함경阿含經』에는 “몸은 땅과 같다. 그리고 착한 생각은 벼이삭과 같고 악한 생각은 잡초와 같다. 잡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잘 익은 벼를 수확하지 못하듯이 사람이 악惡한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도道를 얻지 못하며, 성냄이 많으면 모든 것이 다 가시덤불과 같이 된다.” 했습니다.
어린 시절 농촌에는 농사철에 농부들이 논에서 피를 뽑아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잡초는 살아남기 위해서 벼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구분이 안 간다고 피사리를 하지 않으면 벼가 익어갈 무렵이면 벼보다 먼저 자라서 벼이삭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마치 새 둥지에 뻐꾸기가 알을 먼저 낳아 놓고 다른 알보다 하루나 이틀 먼저 부화하여 둥지의 주인인 새가 낳은 새끼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못된 생존의 형태를 봅니다.
모든 중생들을 연민憐愍하면서도 애욕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이 보살의 행원인 것처럼, 잡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잘 익은 벼를 수확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중국의 장자莊子는 “산에 소나무와 잣나무는 서로 어울려 잘도 사는데, 들녘의 난초와 잡초는 어울리지 못하고 서로 두려워 떨고 있구나.”
소나무와 잣나무는 한 산중에서 잘 어울려 삽니다. 그러나 잡초가 무성한 들녘에는 난초가 못 삽니다. 난초를 가꾸는 사람들은 잡초를 뽑아줘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하고 성냄이 많으면 모든 것이 번뇌의 가시덤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새 정부가 들어 선지 6개월이 채 안 된 시국에 이런저런 극단적인 시위가 용산 삼각지와 광화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상은 어떤 어울림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게 해주는 가르침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논이나 밭도 세 유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논밭은 문전옥답門前沃畓입니다. 두 번째는 자갈이 섞여 있는 논밭이요. 세 번째는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는 논밭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다면 어떤 논밭부터 농사를 지어야 하겠습니까. 문전옥답부터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으며 시간이 허락되면 자갈이 섞인 논밭에 자갈을 제거하는 수고로움을 들여 씨를 뿌리고, 시간여유가 된다면 가시덤불이 우거진 버려진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농사짓는 것이 지혜로운 농부의 일인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까마귀 검다 말고 해오라기 희다 말라. 검은들 모자라며 희다고 남을쏘냐.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 하더라.” 하셨습니다.
황용희의 『가시울타리의 증언』이라는 시에도 “용서하는 순간 분노와 원한과 슬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용서하는 사람은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으며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법구경法句經』에도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쉼이 없나니 원망하는 마음을 쉬어야 원망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나의 스승이란 어떤 분이냐. 단점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잘못한 것을 솔직히 지적해주는 현명한 사람을 만나거든 주저하지 말고 그를 따르라. 그 사람은 나에게 보물이 숨겨진 곳을 알려주는 사람이니 좋은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먼저 내려놓아야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SNS를 통해 들려오는 시위 현장의 목소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적하면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탓하는 것 같으며, 가짜뉴스가 더 활개를 치고 있어서 그 진위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면 결혼식장이나 행사장에 진열되어 있는 화환들이 조화造花인지 생화生花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변별력이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변별력과 경험의 안목이 없거나 보이는 사실들도 지혜가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양 극단의 한쪽 면에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도中道의 길은 극단적인 시각에 매달리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단점을 정확히 말해주고 잘못하는 것을 솔직히 지적해주는 사람을 『법구경』에서는 “그는 나에게 보물이 숨겨진 곳을 알려주는 사람이니 좋은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을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언젠가는 반드시 내게로 되돌아와 나를 손상시킬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소리를 듣거든 마치 나의 부모를 헐뜯는 것처럼 여겨라. 오늘 아침에는 비록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했지만, 내일은 나의 허물을 말할 줄 알아라. 무릇 있는 바의 상相이 다 허망한 것이니, 비방하고 칭찬함에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기뻐할 것이냐.” 하셨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는 “죽은 소에도 우황이 들어있지 않더냐.” 부처님의 설법은 세상에 쓸모없는 생물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내가 지혜의 변별력이 있으면 ‘저 사람처럼 살면 안 되겠네.’라 생각 할 것이니 나의 스승이 될 수 있고 선지식善知識이 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죽은 소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지만, 그런 쓸모없다고 생각하던 죽은 소에는 우황이 들어있어서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 입니다.


『증지부경전增支部經』에 남에게 충고하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유념해서 충고해주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째 충고할만한 때를 가려서 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진심으로 충고하고 거짓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 번째 부드러운 말씨로 이야기하고 거친 말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네 번째 의미 있는 일에만 말하고 무의미한 일은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 인자한 마음으로 말하고 성난 마음으로는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그런 것들을 갈무리 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화禍」라는 법문에서 이렇게 말씀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몹시 화가 났을 때는 화가 나지 않은 척해서는 안 된다.
고통스럽지 않은 척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지금 화가 났으며 그래서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말은 아주 차분하고 침착하게 해야 한다.”
상대방으로 인해 내가 화가 나서 마음이 아프다면 그 사실을 숨기지 말고 그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려주되 화를 내면서 알려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증지부경전』을 통해 부처님이 제시하신 다섯 가지 지혜, 충고할만한 때를 가려서 진심으로 부드러운 말씨로 의미 있는 일에 대해서만 인자한 마음으로 자신의 화난 모습을 드러내는 연민심이 있어야 합니다.
화가 날 때는 화를 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만 깊은 바다처럼, 아무리 파도가 크게 일어나도 바다 수심은 고요해서 김이나 미역, 다시마, 파래 같은 바다 생물이 자라고 있는 것을 우리의 일상에서 살필 줄 아는 불자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