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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명상을 ‘일상’과 접목할 것인가

서양인을 위한 불교 강의



박경희
중도기획 디자인실장


 


『서양인을 위한 불교 강의』
텐진 빠모 지음 / 김윤종 번역
148×225 / 472쪽
25,000원
불광출판사 펴냄



법상에 올라선 텐진 빠모 앞에는 크게 세 부류의 서양인이 앉아 있다. 우선 불교를 처음 접해본 사람들이다. 불교 교리는 물론 수행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온갖 의문 또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명상을 시작해보겠다 다짐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 우선 왜 수행하는지, 어떻게 수행하는지, 그리고 수행을 어떻게 일상으로 가져올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다. 수행에 익숙할 뿐 아니라 명상을 통해 한걸음 깊이 들어가 봤던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중간중간 느꼈던 자신의 ‘체험’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들이다.
텐진 빠모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자신의 체험, 옛이야기, 그리고 경전에 있는 내용들을 섞어가며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고 이들의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서양인들이 맨 처음 불교를 접할 때 보이는 반응 중 하나는 ‘믿을 수 없다.’이다. 윤회나 환생은 물론 명상이나 이를 통해 다다르는 차원의 경지나 깨달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나서 자신은 증명되지 않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이라고 자처한다. 하지만 진정 합리적이라면 열린 마음도 가져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 텐진 빠모는 이제 막 불교를 접하고 특정 내용을 마주쳐 주의 깊게 조사해 봤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해도 그것이 불법佛法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한다. 텐진 빠모 역시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티베트불교 안에서 전혀 수긍하지 못하는 것들이 발견된다고 솔직히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특정 교리와 내가 연결점이 없다는 걸 이해하고 그냥 잠시 옆에 밀쳐놔 둘 수도 있다.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다만, ‘이건 아니지, 이건 진실이 아니야.’라고 말하지 말고 그냥 ‘지금 이 시점에서 내 마음이 이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오히려 이런 방식이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수 있다. 어떤 지혜의 책을 수년간 읽고 또 읽어도, 읽을 때마다 마치 새로운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누구나 한 번씩은 경험했을 것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열림에 따라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더 깊은 층의 의미들을 발견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해하지 못했던 걸 언젠가 나중에 다시 이해할 수도 있다. 처음 불교를 접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이제 막 명상을 실천하고 싶은 서양인들의 관심사는 ‘화’다. 많은 서양인이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법문을 듣고 명상을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자신과 화해를 해야 한다. 텐진 빠모는 서양에서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단점은 빠짐없이 알지만, 자신의 선한 점은 알려고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난 정말이지 화가 너무 많아.”라고 얘기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속마음으로조차 ‘나는 화가 많아. 하지만 또한 관대한 사람이기도 해.’라고 말하려 들지 않는다. 화를 없애기 위해서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지만 그 전에 우선 자신과 화해하지 않으면 아무리 법문을 듣고 명상을 해도 소용없다고 말한다.
이제 어느 정도 수행에 익숙한 서양인들이 보이는 특징도 있다. 명상의 대상과 명상하는 자를 자꾸 나누어본다는 점이다. ‘여기 내가 있고, 여기 수행이 있고, 내가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산봉우리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는 어째서 진전이 없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본래 마음이란 그 대상과 함께 생멸하게 되는데, 마음을 수행과 계속 따로 떼어 놓으면 합일合一이 일어날 리가 없다. 명상을 얼마나 오래 했든 상관이 없다.
텐진 빠모의 강의 그리고 청중 사이에 오가는 질문과 답변을 읽다 보면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며 불교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한국인들에게 더 걸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속으로
문_ 욕망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답_ 그건 당신이 욕망을 어떤 뜻으로 말씀하셨는지에 달려있습니다. 깨달음을 향한 욕망은 좋은 욕망이죠. 우리가 그걸 없애길 원하지는 않아요. 문제는 일상의 욕망이 늘 우리를 속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린 만일 이런저런 욕망을 충족시키기만 한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늘 상상합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욕망은 바닷물 같은 겁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이 커집니다. 욕망 그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 붙는 우리의 집착이 진짜 문제인 거지요. 여러분들이 궁전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큰 저택에서 살 수도 있죠. 롤스로이스를 아흔아홉 대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아무 집착이 없다면, 가령 내일 당장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에 따라 당신이 정말 당혹스러워하고, 되찾기 위해, 방어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기 위해 온통 시간을 쓰고 있다면, 그건 큰 문제라는 겁니다. 무엇을 얼마만큼 가졌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거기 매달리고 흘려보내지 못하는 거예요. 이는 물건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것도 포함됩니다.
191쪽 「사마타 수행 – 고요 속에 머물기」 ‘묻고 답하기’ 중


생각과 감정을 갖는다는 점이 문제가 아니에요. 생각과 감정이란 마음에 있어 자연스러운 겁니다.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는 게 당연한 것과 마찬가지예요. 문제는 우리가 그것에 신념을 부여하고, 그것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부여잡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만약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저 지나가는 정신적 상태로 보면 그 속성상 투명하기에, 지혜롭기 그지없는 마음의 장난이기에,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파도처럼 일어났다 사라질 뿐입니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하지 않죠.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올라오면 그 즉시 거기 올라탑니다. 그것을 부풀리고, 거기 푹 빠지고, 반복해서 그것을 지속하게 만들어요. 동일시하고, 끝없이 곱씹고, 걱정합니다. 행여 좋지 않은 일이라면 스스로 자책합니다. 그저 흘려보내질 않아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 기억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합니다. 우리는 기억에 극도로 집착하는데, 이는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으로 정의된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그 기억이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여전히 그것들을 흘려보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나야.’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억일는지는 몰라도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이미 가버리고 없어요. 대체 어째서 그것들을 부여잡고 우리의 자아상으로 삼아야 합니까? 하지만 우린 그렇게 하죠.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기에 고통당합니다.
204쪽 「위빠사나 –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중


무엇보다 우선, 창조적 상상의 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에는 여러 층이 존재합니다. 표면에 가까울수록 언어에 반응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말보다는 이미지에 반응해요. 마음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언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미지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수용적입니다. 이들 이미지는 훨씬 더 깊은 층으로 스며들며 변용을 끌어냅니다. 그저 표면적일 뿐인 개념들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에요. 자비로운 생각들을 예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가령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다든가 모든 존재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게 있겠죠. 이런 것들은 어느 한 층에서는 동기부여가 되는 좋은 수행이지만 마음의 모든 층에 이르기까지 스며들며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아주 원시적인 마음은 이 모든 것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그런 생각들은 지성의 수준, 즉 저 위쪽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맴돌 뿐입니다. 마음을 완전히 변용하려면 훨씬 더 깊은 층들에 가 닿을 방법이 필요한 겁니다. 이는 이미지들을 이용함으로써 가능해요. 융 학파의 심리학에서 어째서 이미지들로 만들어진 도구들을 그렇게나 많이 사용하는지가 일례가 될 겁니다.
453~453쪽 「시각화 명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