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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아뢰아식 속에 감춰진 무의식 세계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내가 그리스를 순례하며 자주 마신 맥주가 미토스(Mythos)다. 미토스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신화를 부르는 말이다. 맥주를 마시듯 그들은 옛부터 ‘신화’를 마셔왔다. 그 신화는 그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각이 되었다.
기원전 6~7세기 자연철학이 출현해 자연현상을 ‘신의 행위’가 아니라 ‘어떤 원인에 따른 현상(인과)’으로 규명하기 시작하고, 소크라테스 이후 신화적 사고는 이성적 사고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화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 아직도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지금도 번개가 치는 날이면 천벌을 맞지 않을까 두려움에 떠는 게 인간이다. 그리스인들은 번개를 제우스가 내려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제우스를 ‘번개(천둥)의 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하물며 번개나 폭풍, 해일, 홍수, 지진, 일식 등 자연현상에 무지했던 고대 원시인들은 어떠했을까. 이해할 수 없어 두렵고 불안케 하는 영역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정리’해야 그나마 심리적 안정감을 갖는 게 인간이다. 실상은 아는 게 없을지라도. 그것이 ‘지식’으로 포장되기도 하는데, 원시인들이 자기 나름대로 ‘지식’을 구성한 게 ‘신화’인 셈이다. 하늘은 제우스, 땅은 데메테르, 바다는 포세이돈, 지하세계는 하데스…. 이런 식으로.
<일리아스>에 그려진 제우스의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나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강하다. 한번 하늘에다 황금의 밧줄을 매어, 모든 신들과 여신들이 이것을 붙잡고 매달려보라. 그래도 나 제우스 하나를 끌어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면 그 언제라도 그대들을 끌어올릴 수 있다. 나는 그 끝을 올림포스의 끝에 매어 대지와 바다까지도 매달 수 있다.”
이런 제우스를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스신화 속에서 제우스에게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면 분명해진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천하의 지배권을 손에 넣고, 자신을 넘볼 것 같으면 자식도 잡아먹어버리는 제우스다.
신들의 세계는 이렇게 출발했다. 선禪불교에서 관념적 타성을 타파하기 위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조상)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의미로 쓰는 ‘살불살조殺佛殺祖’가 그리스 신화에선 실화처럼 그려진다.
제우스도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볍게 죽이고, 대홍수를 일으켜 멸망시켜버리기도 한다.
히틀러나 스탈린, 폴포트 처럼 살육을 일삼은 독재자의 모델은 신화시대의 신일 것이다. 캄보디아에 보면 폴포트가 아이들의 다리를 잡고 나무에 쳐서 죽이는 장면은 힌두 신화를 그린 사원 벽화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구약과 신화의 시대는 파워에 의한 공포통치다. 인간은 진정한 존경과 믿음 때문이 아니라 이런 두려움에 굴복한다.
그런 폭압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도덕 세계를 연 이가 부처이고 성인이다.
이 성인들이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훔쳐왔다는 빛으로 인류를 이끈다. 그런데도 인류의 무의식은 여전히 공포스런 구약과 신화시대에 머물러 좀체 성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지만.
제우스는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여신과 인간에게 접근해 러브신을 갖는다. 그래서 영웅들의 대부분은 제우스와 인간들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다.
올림포스 신들이 죽이고, 질투하고, 바람을 피우고, 강간하고 근친상간이나 동성애를 하는 건 예사다.
현명한 철학자들과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그리스에서 실상 날만 새면 전쟁이 계속되고, 남성들이 여성들을 억압한 상태에서 첩과 여자 노예와 창녀들과 자유스럽게 정사를 하고, 잘생긴 소년들을 거느리는 소년애의 특권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든든한 배경은 그리스인들의 정신적 주主인 신들의 방종일 게다.
그래서 기원전 6세기 엘레야 학파의 태두가 된 음유시인 크세노파네스는 신들을 그렇게 ‘퇴폐적’으로 묘사한 것을 비난한다. 만약 소나 말이 신들을 그린다면 신을 소나 말처럼 그렸을 것이라면서. 그는  <일리아스>를 쓴 호메로스나 <신통기>를 쓴 헤시오도스에 대해 “그들은 인간이 저지른 추악한 죄악을 신들에게 전가했다.”고 비난한다.
마음대로 천하의 권력을 쥐락펴락하고, 인간을 종처럼 부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고, 아름다운 사람은 여자건 남자건 모두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그런 신은 인간적 욕망의 투사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신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지중해 건너편 히브리의 최고신 여호와도 살상에 있어선 제우스를 능가했다. 구약의 출애급기와 만수기, 여호수아 사무엘 등엔 여호아가 다른 신을 섬기거나 자신을 섬기지 않는 이들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잔혹 살인극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스 신화 중 시시포스 신화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시시포스가 바위를 산 정상에 올리면 굴러떨어지고 올리면 굴러떨어져 끝없이 고통을 받는 벌을 받는 과정이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제우스는 아이기나에게 반해 그를 어떻게 손에 넣을까 고민하다가 독수리로 변해 낚아채어 오이노네섬으로 납치해간다.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의 신’ 아소포스는 딸을 찾아 그리스 전역을 헤매다가 코린토스 에스시시포스왕을 만나 제우스와 딸의 행방을 좀 가르쳐 달라고 사정한다. 아이기나가 자기 아크로폴리스에 분수를 만들어 헌납하자 시시포스왕은 제우스가 있는 곳을 가르쳐준다. 아소포스는 ‘딸 찾아 삼만리 끝’에 제우스에게 딸이 희롱 당하는 현장을 덮친다. 그러자 제우스는 아소포스에게 사과하기는커녕 화가 난 나머지 벼락을 쳐 아소포스를 태워 죽인다. 그리고 자신의 행선지를 알려준 시시포스에겐 바위를 정상에 끝없이 올리는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시시포스만이 아니다. 바위의 쇠사슬에 묶여 날마다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간이 자라 다시 간을 먹히는 고통을 받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하늘의 불을 주었다는 이유로 그런 벌을 받았다.
프로메테우스의 죄라면 인간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제우스가 인간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켰을 때도 이를 눈치 채고 피난시켜 인간 종족을 유지케 한 것도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는 것은 신의 상징인 ‘내면의 빛’을 인간에게 전해 인간도 신과 같은 빛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 맞서면서까지 살려주고 도와줄 가치가 인간에게 있었을까. 그런 고초 끝에 건네준 빛을 내팽개친 채 남의 피로만 생명을 연장하려는 드라큐라처럼 여전히 외부의 빛만을 갈구하는 인간을. 그것도 모자라 신에게 자기들의 탐욕을 채워줄 것을 간구하면서 온갖 생명에 대한 신적인 폭력으로 생태계의 근본을 흔드는 탐욕스런 포식동물을.
현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신화의 세계는 신의 전횡과 운명론 같이 불합리하기 그지없다. 신화에 대해 고대 철학자들도 논리 이전의 원시 몽매한 사고로 보는가하면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원시적 인간의 ‘성적 본능’(리비도)에 기반을 둔 심리적 현상으로서 왜곡된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원시적 신화의 세계는 탐욕과 배타와 살상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다. 그런 신화는 소크라테스가 원시적 신화 속에 잠자는 인간들의 ‘이성’(로고스)을 깨운 것처럼 부처와 공자 같은 성인들은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세상에 ‘도덕’을 깨웠다. 그래서 신이나 지배자 등 소수만이 아니라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겉 의식은 수많은 철학자처럼 진화한 것 같지만, 원시적 무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무궁무진한 신화의 바다에서 노닐다보면 ‘도덕’이나 ‘에티켓’ 이전에 감춰진 인간 무의식의 판도라를 열어젖힌 것만 같다. 신화는 우리의 아뢰아식 속에 감춰진 정제되지 않은 무의식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