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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연기를 본 자 법을 설하다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선남자 선여인이 마하 반야바라밀의 미묘행을 닦기 원할 때
오온조차도 자성이 비어 있음을 명확히 보라.
물질은 비어 있으며 그 비어있음 자체가 물질이니
비어있음 그 자체와 별도로 물질이 따로 있음이 아님을 알라.
눈의 경계부터 의식의 경계까지 일체가 공하니
오직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위없는 원만의 구족을 깨달을 지이다.
-붓다의 법수삼매 가운데-


한 때 동물원을 방문했을 때 하나의 우리 안에 호랑이와 사슴 무리가 함께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상황이 의아하여 사육사에게 포식 관계의 종이 어떻게 지낼 수 있는가를 물었지요. 사육사는 호랑이가 사육사가 제공하는 육 고기를 주기적으로 받아먹은 이후로 야생의 본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답을 하였습니다.
반면 인간은 어떠한지요. 절대 필요한 만큼만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지난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월한 권력 집단에 의해 전쟁이 야기되며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인명 피해를 일으켰습니까. 청일전쟁 말 무렵인 1935년도에 출생한 저는 격동의 시대를 아우르며 성장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시대와 달리 오늘의 21세기는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고 있음에 어느 정도 안도감을 느낍니다. 더불어 보다 긍정적인 미래를 희망해 보기도 합니다. 지금은 지난 전쟁의 폐단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각 계의 지도자로 성장하여 본래의 인간 가치를 회복하는데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수단은 오직 대화를 통해서 진행 되어야 하며 궁극의 갈등을 해결하는 대안을 구한다는 점에 세계의 많은 정상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마음의 변화에 보다 주목하고자 합니다. 단순히 복을 기원하는 기복의 수단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참구의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유한 붓다의 가르침이 승가를 통해 재가불자와 폭넓은 토론의 장으로 마련되어 삶 속에서 활성화 되어야겠습니다.


오류가 없는 의식의 작용과 대상의 자성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진실로 실제 하지 않음에 대해 반드시 오류가 없는 육식六識으로써 사유되어야 합니다. 실제 없는 대상을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 그 자체가 자성이 있음임을 알고 진정한 무자성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오류 없는 식에 의해서 실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본래 무자성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 월칭보살은 입중론의 제 1장을 통해 공덕 자량이 뒷받침이 될 때 비로소 인무아를 초월한다고 논하였습니다. 초지 보살은 복덕 자량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종성으로써는 아라한에 비해 보다 심식으로 뛰어나다고 이르고 있습니다.
공성이란 연기의 이치에 근거하여 티끌조차에도 실체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진실로서 실제 하지 않음을 사유함에 오류가 없어야 합니다. 마음으로써 비롯되어 존재 한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오류의 사유임을 깨우쳐야 합니다. 최종의 진여에는 그 무엇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쫑카빠 대사는 삼종요도를 통해, 현현함이 모두 공함을 알고 그를 통해 상변과 단변의 양변이 사라지도록 대상의 실제를 공성으로 고찰하면 세간의 이름 붙여진 상호 의존하는 것의 진여를 마침내 알게 된다고 논하였습니다.
쫑까빠 대사는 거듭 사유하는 정진의 수행력으로 문수보살을 대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깊고 심현한 경계에 이르러 푸른 빛 안에 문수보살이 계신 것을 직접 뵌 이후 많은 법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공을 깨우칠 수 있을까에 대한 자발적 의문을 세운 쫑까빠 대사는 문수보살로부터 이와 같은 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정진을 쉼 없이 꾸준히 한다면 치우침 없는 견성에 이르리라.”
깨우침의 견성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법을 정진하면서 수 없이 많은 견성의 착각을 일으킵니다. 수행자는 스승으로부터 들은 법을 사유하고 논의하여 지속적인 수행으로 삼을 때만 비로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수행의 단계입니다. 아무리 제불보살을 악착같이 친견하고 의지한다 하여도 쉼 없는 문사수의 정진 수행 없이 이룰 수 있는 지혜의 성과는 없습니다.
불법에서 아우르는 연기의 법이란 실체가 없이 상호 의존하기에 공하다는 논리입니다. 문사수의 수승한 지혜의 논리로 공성을 직접 체득함과 동시에 내면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무주처열반을 얻음이 붓다의 경계입니다. 내가 본 법의 경계만큼 실천될 수 있는 정진력의 힘이 뒷받침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간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무명의 뿌리는 본래 자아의 내면을 돌보지 못함에 기인합니다. 무명이란 무엇인가.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공성을 바로 보지 못하고 실집을 일으키게 됩니다. 무명의 근저에 있는 미세한 허물, 그것이 바로 실집입니다.
내면의 자성을 볼 수 있는 힘을 키우세요. 자아의 참됨이 보다 명료해질 때 수행의 길이 보입니다. 무명에 대한 확신은 불법을 통해서만 헤아릴 수 있습니다. 참된 자아 다시 말해 공성의 본 뜻을 볼 때 비로소 실집과 상응되는 사랑과 연민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바른 선이라고 명합니다.
우리의 삶은 전반적으로 실상을 왜곡되게 보도록 교육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대하기란 막상 쉽지 않습니다. 저의 지인 가운데 가톨릭 신부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제 있다고 생각하는 자상自相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사유할수록 창조물인 인간으로서의 세상살이가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요.” 정작 ‘나’라고 하는 생각의 논점에 있어서 불법은 공성으로써의 무아 이론을 내세웁니다. 기독교의 창조론과는 사유의 시작 지점 자체가 틀립니다. 다만 종교로서 지향하는 인류애에 기반을 둔 사랑과 자비는 그 목적에 있어서 다름이 없습니다.
연기를 사유하면 괴로움의 실체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행고를 명확히 인식할 때 무명의 본체를 바르게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무명을 끊을 수 있는 확신이 생겨 멸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도제에 대한 수행의 정진력을 얻습니다. 연기의 공성을 사유할수록 사성제의 참된 도리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다양한 수행의 방법에 호기심을 내기보다 붓다께서 초전법륜에서 설하진 법의 뼈대가 되는 사성제의 도리를 먼저 사유해 보십시오. 연기의 도리를 먼저 헤아려 수행의 방향을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조건에 의존하는 바의 자성을 찾아봅시다. 공성을 알면 알아갈수록 게으르고 집착할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