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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함을 잃지 않는 삶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초대하지 않았어도 저 세상에서 찾아왔고 이 세상에서 허락하지 않아도 저~~~ 세상으로 떠나가야 하는 우리네 인생의 현실인 사바세계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은 많은 일들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엊그제가 입춘立春인듯 하였는데, 춘분春分, 하지夏至, 추분秋分, 동지 冬至입니다. 소한小寒, 대한大寒 지나면 다시 입춘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24절기는 하염없이 반복되어 흘러가며 공전公轉하고 있습니다.
1년이 24절기이듯 하루는 24시간 입니다. 그 하루의 시간은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돌고 있는 자전自轉의 시간입니다. 거리로는 4만km입니다.
하루 자전하는 4만km를 24시간으로 나누어보면 한 시간에 1,666km를 돌고 있습니다. 단위로 보면 1분에 27.75km를 돌고 있으며, 초 단위로 드려다 보면 1초에 462.5m를 지구는 자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전하는 시간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네 인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 년의 마지막 날인 동짓날에 생로병사生老病死로 이어지는 인생살이를 허송세월하며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다잡아 보며 살아온 시간들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참 멀리도 왔구나 싶습니다.


통도사에 갔다가 동지기도 때문에 서둘러 올라오다가 30년 전, 동짓날 새벽에 월하 노스님께서 전화 주셨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습니다.
유난히도 추었던 그해 겨울, 구룡사에서 백고좌법회 百高座法會를 마치고 통도사에 가서 노스님 모시고 외출도 하며 며칠간 머물며 지내다가 동지기도법회 때문에 구룡사로 전날저녁 늦은 시간에 올라 왔습니다.
몇 일간 있다가 올라왔는데, 동짓날 꼭두새벽에 스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정우가~~~’ 예~~~ ‘잘 올라갔나?’ 예~~~ ‘들어가라고~~~’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이 짧은 전화는 전날까지 통도사에 머물며 노스님 곁에 있다가 구룡사로 올라와, 하루도 안 된 이른 시간에 노스님과 통화 내용의 전부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 옵니다.
이 짧은 노스님의 음성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긴 여운으로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스님의 인자하심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상하신 연민의 자비심이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많습니다. 고통과 괴로움도 그것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번뇌煩惱망상妄想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혼란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입니다. 마음을 괴롭히는 감정적 경험,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가면 좋을까요?
수행修行과 정진精進으로 이루어지는 보리심菩提心과 지혜智慧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불자佛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經에서 이르시기를, “불자들이여, 모든 중생들이 항상 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네 가지 이치에 뒤바뀌게 되었으나, 생각하는 연고로 모든 법이 무상하고, 괴롭고, 나(我)가 없고, 불확실한 현상계를 살며, 이렇게 전도된 네 가지 이치가 그런 생각을 드러냄으로 즉시에 끊어질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나니, 이런 뜻으로 생각하는 인연으로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하였느니라.”
 
불교의 구경究竟은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항상 된 나, 즐거운 나, 참 나, 깨끗한 나가 본성本性입니다. 항상 한 나는 법신法身입니다, 즐거운 나는 열반이며 참 나는 부처이며 깨끗한 나는 법法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현상계는 무상한 나, 괴로운 나, 참 나가 아닌 자아自我, 부정不淨한 세상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나를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며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아픔을 지닌다는 것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오늘과 같은 동짓날, 한 해가 저물고 한 해를 다시 시작하는 절기에 우리들에게 스스로 인생을 생각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동짓날에 우리가 팥죽을 먹는 풍습도 들여다보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도 결국 생물학적으로 보면 동물과에 속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생하지 말고,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고, 청정한 행동을 하고, 거짓되지 않게 살고, 혼침昏沈에 빠지지 않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초식동물은 상대적으로 유순하고 육식동물은 포악하고 거친 면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오계五戒를 지키며 살라고 하신 것은 육식동물의 근성을 여의고 그 자리에 자비종자慈悲種子를 심고 지니며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셨습니다.
살생하지 않는 생활이 훨씬 더 자애로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괴로운 것은 나(我)라고 하는 아집我執과 편견偏見 때문입니다.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고통과 괴로움도 없어지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에 집착해서 비춰지는 현상들입니다. 인식기관인 육근六根이 인식대상인 육진경계를 인식작용으로 집착해서 그것들을 내 것이라고 여기고, 애착을 가지며, 얽매인 삶을 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집착을 끊어버리면 내 것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들입니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것에 집착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되돌아볼 일들이 있습니다.


불교가 인생과 다르지 아니하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간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불교보다 더 좋은 종교의 가르침이 있었다면 스스럼없이 불교를 떠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600년 동안 계승되어 온 불교보다 더 좋은 가르침은 접하지 못했고 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 제자인 것을 늘 기뻐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한 번도 부처님 제자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이 어렵고 힘든 사회에 노출되어 있는 불자로서 우리도 부처님 제자인 것이 얼마나 큰 복福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한 해를 뒤돌아보고, 전후좌우도 살피고,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했던 일들이 있었다면 다시 마음을 다잡아서 새로운 시간들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1초에 462.5m를 가고 있는 시간 속에 노출되어 있는 인생이지만, 그 속에서 전후좌우를 살피며 “잘못된 일이 있으면 참회懺悔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생이 바로 장부의 기상이요 불자의 참 모습”이라고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도 말씀하였습니다.


허물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밝음의 부재현상일 뿐입니다. 밝음이 비치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처럼 지은 허물을 스스로 뉘우쳐서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하며 참회를 하면 죄업罪業 역시 실체가 없어서 저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인생은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은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은 또 장래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사바세계娑婆世界 오탁악세五濁惡世는 불안정한 삶의 현장이라지만, 불자의 삶 속에는 꿈과 희망과 장래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힘차고, 용기 있게, 지혜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짓날 노스님께서 주셨던 전화를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도 어른 스님처럼, 자상하고 인자하신 따뜻한 기운을 가족들에게 전해주며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 입니다.
‘정우가~~~’ 예~~~ ‘잘 올라갔나?’  예~~~ ‘들어가라고~~~’ 예~~~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여러분들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흘러가는 시간에 정신없이 살지 말고 전후좌우를 살피며 관심과 배려를 가질 수 있는 인자함을 잃지 않는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