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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불자

요즘 양분된 바깥세상을 지켜보면서 ‘변조광명무여지.照光明無餘地요 하방세계유암야下方世界有暗耶’의 가르침을 떠올려봅니다.
광명은 빈부귀천貧富貴賤과 상방하방上方下方을 논하지 않고 두루 비추이고 있으니 그 어떤 세상인들 어두움이 있겠느냐 하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인간을 가장 이상적인 존재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오탁악세五濁惡世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을 흔히 작은 우주라 합니다.
지구에도 오대양 육대주가 있는 것처럼 우리 몸에도 오장육부가 있습니다.
몸에는 인식기관이 있습니다. 눈도 코도 귀도 두 개인데, 입은 하나입니다.
마음은 하나의 마음이지만, 분별심分別心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우리네 몸에서 어디 중요하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 오른손이 중요한 것만큼 왼손도 중요합니다. 오른쪽 눈이 중요한 것만큼 왼쪽 눈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사회 현상을 지켜보면, 보수와 진보는 진영논리로 무장하고 극단적인 자기표현들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옳다고 반목하며 다투며 매몰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싶은데도, 우리 몸에도 왼손도 오른손도 중요하건만 서로 양분된 행동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라도 이념적理念的으로 치우치지 말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중도론中道論의 변별력으로 기다려주는 세상과 어울리며 함께 살아갔으면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착각과 번뇌에 지배당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믿고 따르는 불자는 착각과 번뇌에 지배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과 근본에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토대로 착각과 번뇌에 지배당하는 이들의 인생살이를 하나씩 풀어줄 수 있는 윤활유의 역할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불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는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떤 것일까요? 나의 본성을 찾아 깨닫는 것은, 좀 더 해야 할 일을 실천하는 보살의 인간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초기경전의 불교에서는 신 지 행 득信知行得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양식으로 번역을 하면 ‘믿어라, 알아라, 행하라, 얻으리라’일 것입니다.
대승경전인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신 해 행 증信解行證으로 전합니다.
불교에 대한 바른 믿음과 그 믿음을 바탕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 그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올바르게 증장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믿음에서 나아가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과 수행의 덕목으로 증장해 중생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대원행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중국의 철학자 팡차오후이(方朝暉)는 『나를 지켜내는 것』에서 “나를 지키려면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고 자기 도리를 다하면서 떳떳하게 살아가며 당당한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근본을 잊지 않고 자기 도리를 하면서 떳떳하게 살며 당당한 자기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기 성찰이 있어야하고 보리심菩提心을 점검해야하는 공부가 필요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사물에 대한 생각이 잘못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선입견先入見의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는 이도 있고, 일념一念이 만년萬年인 이도 있는가 하면, 하루에도 만 번 태어났다 만 번 죽는 것처럼 수없는 번뇌와 망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음을 언제나 비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무심無心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무심은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교의 무심은 한결같은 마음, 시비하거나 분별하지 않는 항상恒常한 마음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맹인모상盲人摸象,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우화가 있습니다.
코끼리의 상아를 만져본 이는 코끼리 모양이 무우 같다고 했습니다. 귀를 만져본 이는 곡식을 켜는 키와 같다, 코를 만져본 이는 절구 같다, 다리를 만져본 이는 나무토막 같다, 등을 쓰다듬어 본이는 평상바닥과 같다, 배를 만져본 이는 옹기로 만든 항아리 같다, 꼬리를 만져본 이는 동아줄 같다고 했습니다.
코끼리를 보았거나 알고 있는 눈뜬 이라면 장애인이 말하는 코끼리에 대한 부분 이야기도 코끼리의 어디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이해할 것입니다.
장애인은 코끼리의 실상 전체를 보지는 못하지만, 눈 밝은 이가 보면 코끼리에 대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코끼리의 전체를 말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코끼리를 말하지 아니 한 것은 아닙니다.
틱낫한 스님은 “그대가 꽃과 나무에 물을 줄 때, 그것은 지구 전체에 물을 주는 것이다. 꽃과 나무에 말을 거는 것은 그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무수한 시간 동안 함께 존재해 왔다.”는 이 가르침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공자님도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곧 어둡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곧 혼돈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몰라도 되는 것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의 삶을 살찌우게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내몰아치는 것들입니다. 부부도 처음에 만날 때는 사랑으로 맺어지지만, 백년해로하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와 배려로 백년을 함께 한다고 하였습니다.
환경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님은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도 하였습니다.
아는 것이 있으면 아는 것만큼 가르쳐주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직함이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 등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은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잘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잘 살지 못하는 이들은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그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부터라도 스스로 남은 시간, 남은 인생을 더 열심히 살아가며, 설령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도 어울리면 잘 살아가지 않겠는가 싶은 마음을 전합니다.